왜 나는 환경주의자가 아닌가?
환경주의와 경제학은 얼핏, 종교와 과학의 관계처럼 보인다. 종교란 것이 내세를 걱정하는 인간의 활동영역이고 과학이란 것은 현세를 고민하는 영역이란 것을 생각할 때 (사이비말고 진짜) 환경주의는 (나도 누리지만) 후세에게 "더 살기좋은" 환경을 물려주자는 것이고 경제학은 지금 내가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를 고뇌하는 학문영역이기 때문에 든 생각이다. 그리고 트랙백한 이 글은, 경제학의 관점에서 환경주의를 미신으로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내 생각을 말하라면, 모든 종교가 미신이나 인민의 아편이 아니듯이 (대개는 그렇긴 하지만) 모든 환경주의가 미신인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역시 대개는 그렇긴 하지만). 그런데 미신이라고 해서 모두 역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미신같은 환경주의도 역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고 순기능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종이의 재활용은 확실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우선 종이를 재활용하는데는 새 종이를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비용이 들어간다.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이 비용은 기꺼이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되지만, 잠깐만 생각해봐도 나무 몇그루는 살아날 지 모르지만 그만큼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고 에너지는 대개 화석연료나 원자력으로 만드니 그만큼 오염이 심해진다. 계산하기에 따라서는 재활용쪽이 더 환경오염이 심하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반면 나무 (및 광합성하는 식물) 는 전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산소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공장이란 점에서 보호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그런데 큰 나무가 더 많은 산소를 만들어내는가 혹은 큰 나무 한그루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심은 작은 나무 여러그루가 더 많은 산소를 만들어내는가는 또 논쟁의 여지가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늙으면 효율이 떨어진다. 효율로 따지자면 적당히 큰 나무는 베어내고 작은 나무를 심는 쪽이 효율이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병아리는 딱 3 개월 키우고 출하하는 쪽이 효율이 최고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이하로 키우면 먹을 것이 없고 그 이상으로 키우면 사료낭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고기이지만 닭에게는 소중한 생명인 것을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맞았다. 그게 경제학이다. 과학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 오직 진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환경주의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과학의 영역을 도덕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 목하의 환경주의가 빠진 함정이다. 또 그것이 경제학과 대화가 전혀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 죽어가는 나무가 가엾다면 당신이 지금 먹는 쌀이나 밀가루는 벼나 밀의 소중한 씨앗들인데 가엾지 않나? 후손에게 더 많은 자연환경을 남겨주는 것이 소중하다면, 후손들에게 더 편리하고 안전하고 쾌적한 생활을 남겨주는 것은 소중하지 않나?
나보고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주차장보다는 숲을 고르겠지만, 그것은 내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나는 주차장보다는 숲쪽이 내 고상한 미감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주차장은 조금 쳐다보면 싫증나지만 숲은 아무리 쳐다봐도 싫증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이게 숲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게 내 숲이라면, 내가 처분을 결정할 수 있다면, 나는 숲을 보존할 것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 취향을 근거로 하여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다. 설득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내 논리를 납득시킨다는 뜻인데 취향은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다수결의 문제라면,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집결시키거나 다른 취향의 사람들에게 내 취향의 느낌을 공유시키고 취향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겠다. 하지만 이 지역의 개발로 이익이 얼마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후손에게 아름다운 숲을 물려주자고 하는 것은 전혀 번짓수가 틀린 이야기이고 이런 이야기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중학생 이하(만) 관람가인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자신이 희생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욕구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충동이다.'
영어식으로 표현하자면, I cannot agree more 이다. 환경주의자 및 얼치기 사회운동가들의 하나같은 공통점은, "나는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데 왜 니들은 그게 안되어 있냐?" 고 대중을 힐난한다는 점이다. 고속철을 안내면 산에 터널을 안내도 되니까 곰, 사슴, 노루등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데 (실제로 이런 대형 포유류는 이미 멸종직전이니까 사실은 쓰레기청소부 청설모, 다람쥐, 까치, 고양이 등이 자유롭게 살 수 있지만) 도대체 30분 일찍 가려고 고속철을 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고 울면서 호소해봐야 자기들이 사회생활도 안해보고 도대체가 생활인의 감각이란 게 없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할 뿐이다. 30 분 아니라, 다만 5 분이라도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면 백만원이라도 내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고 30분의 현금가치가 백만원도 넘는 때도 있는 것이다. 그들은 30분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없지만, 그럴 이유가 있는 사람도 있고, 그들도 자기에게 유리한 환경을 고를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들의 요구가 사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이 얼치기 환경주의자들은 (아마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원글의 덧글에도 남겼지만 이 글의 저자는 (아마도 일부러) 환경주의자들의 반대쪽 끝에 서서 다소 냉소하듯이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은 정말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이다. 다만 이 글이 다소 치우쳐져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다. 다시 한번 좋은 글을 올려주신 딸기봄님께 감사를 드린다.
환경주의와 경제학은 얼핏, 종교와 과학의 관계처럼 보인다. 종교란 것이 내세를 걱정하는 인간의 활동영역이고 과학이란 것은 현세를 고민하는 영역이란 것을 생각할 때 (사이비말고 진짜) 환경주의는 (나도 누리지만) 후세에게 "더 살기좋은" 환경을 물려주자는 것이고 경제학은 지금 내가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를 고뇌하는 학문영역이기 때문에 든 생각이다. 그리고 트랙백한 이 글은, 경제학의 관점에서 환경주의를 미신으로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내 생각을 말하라면, 모든 종교가 미신이나 인민의 아편이 아니듯이 (대개는 그렇긴 하지만) 모든 환경주의가 미신인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역시 대개는 그렇긴 하지만). 그런데 미신이라고 해서 모두 역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미신같은 환경주의도 역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고 순기능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종이의 재활용은 확실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우선 종이를 재활용하는데는 새 종이를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비용이 들어간다.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이 비용은 기꺼이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되지만, 잠깐만 생각해봐도 나무 몇그루는 살아날 지 모르지만 그만큼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고 에너지는 대개 화석연료나 원자력으로 만드니 그만큼 오염이 심해진다. 계산하기에 따라서는 재활용쪽이 더 환경오염이 심하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반면 나무 (및 광합성하는 식물) 는 전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산소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공장이란 점에서 보호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그런데 큰 나무가 더 많은 산소를 만들어내는가 혹은 큰 나무 한그루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심은 작은 나무 여러그루가 더 많은 산소를 만들어내는가는 또 논쟁의 여지가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늙으면 효율이 떨어진다. 효율로 따지자면 적당히 큰 나무는 베어내고 작은 나무를 심는 쪽이 효율이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병아리는 딱 3 개월 키우고 출하하는 쪽이 효율이 최고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이하로 키우면 먹을 것이 없고 그 이상으로 키우면 사료낭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고기이지만 닭에게는 소중한 생명인 것을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맞았다. 그게 경제학이다. 과학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 오직 진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환경주의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과학의 영역을 도덕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 목하의 환경주의가 빠진 함정이다. 또 그것이 경제학과 대화가 전혀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 죽어가는 나무가 가엾다면 당신이 지금 먹는 쌀이나 밀가루는 벼나 밀의 소중한 씨앗들인데 가엾지 않나? 후손에게 더 많은 자연환경을 남겨주는 것이 소중하다면, 후손들에게 더 편리하고 안전하고 쾌적한 생활을 남겨주는 것은 소중하지 않나?
나보고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주차장보다는 숲을 고르겠지만, 그것은 내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나는 주차장보다는 숲쪽이 내 고상한 미감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주차장은 조금 쳐다보면 싫증나지만 숲은 아무리 쳐다봐도 싫증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이게 숲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게 내 숲이라면, 내가 처분을 결정할 수 있다면, 나는 숲을 보존할 것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 취향을 근거로 하여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다. 설득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내 논리를 납득시킨다는 뜻인데 취향은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다수결의 문제라면,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집결시키거나 다른 취향의 사람들에게 내 취향의 느낌을 공유시키고 취향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겠다. 하지만 이 지역의 개발로 이익이 얼마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후손에게 아름다운 숲을 물려주자고 하는 것은 전혀 번짓수가 틀린 이야기이고 이런 이야기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중학생 이하(만) 관람가인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자신이 희생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욕구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충동이다.'
영어식으로 표현하자면, I cannot agree more 이다. 환경주의자 및 얼치기 사회운동가들의 하나같은 공통점은, "나는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데 왜 니들은 그게 안되어 있냐?" 고 대중을 힐난한다는 점이다. 고속철을 안내면 산에 터널을 안내도 되니까 곰, 사슴, 노루등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데 (실제로 이런 대형 포유류는 이미 멸종직전이니까 사실은 쓰레기청소부 청설모, 다람쥐, 까치, 고양이 등이 자유롭게 살 수 있지만) 도대체 30분 일찍 가려고 고속철을 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고 울면서 호소해봐야 자기들이 사회생활도 안해보고 도대체가 생활인의 감각이란 게 없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할 뿐이다. 30 분 아니라, 다만 5 분이라도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면 백만원이라도 내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고 30분의 현금가치가 백만원도 넘는 때도 있는 것이다. 그들은 30분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없지만, 그럴 이유가 있는 사람도 있고, 그들도 자기에게 유리한 환경을 고를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들의 요구가 사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이 얼치기 환경주의자들은 (아마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원글의 덧글에도 남겼지만 이 글의 저자는 (아마도 일부러) 환경주의자들의 반대쪽 끝에 서서 다소 냉소하듯이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은 정말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이다. 다만 이 글이 다소 치우쳐져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다. 다시 한번 좋은 글을 올려주신 딸기봄님께 감사를 드린다.









덧글
야비 2005/09/29 16:11 # 삭제 답글
링크타고타고 왔다가 종종 들르게되었습니다.뭔가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게 하는 글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공감가는 글들이 있어서 퍼가고싶습니다만
이글루스 유저는 아닌지라 자료용으로 네이버 블로그만 있습니다.
글을 복사해서 퍼가고. 게시물에 링크와 출처 표시를 하면 될까요?
일단 신고드리고, 퍼갑니다. 하하 ^ㅂ^//
기불이 2005/09/29 21:58 # 답글
죄송합니다만 싫은데염. 많은 일을 겪으면서 펌글은 혐오하게 됐습니다. 이미 퍼간 글은 어쩔 수 없다해도 앞으로는 죄송합니다만 삼가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