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by 기불이

김부식은 명문장이고 이완용은 명필인가?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 가 시적으로 좋다고 할 수 없다 라는 이야기가 붙었다. 독자 여러분 중에 이 시를 노래가사로는 잘 아시겠지만 전체 시를 다 읽어보지 않은 분들도 꽤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전체 시를 감상해보시고 시적으로 좋다고 할 수 없는지 아닌지 판단해보시기 바란다. 시를 전체 옮겨오는 것은 저작권법 위반이라고 하던데 이 경우는 어쩔 수가 없구랴. 항의가 들어오면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손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만일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가 시적으로 좋다고 할 수 없다면 박노해의 시편들이나 백무산의 시편들은 뭐라고 해야 할랑가. 박노해의 '손무덤' 은 손가락 안짤려본 사람에겐 감동을 못주는 겐가.... 정몽주의 '단심가' 는 ('이몸이 죽어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시의 주제를 너무나 분명히 제시했기 때문에 그 의의를 이루게 될 경우에는 그 감동의 영역은 사라지게 되어 있" 는 운명이었을까?

'타는 목마름으로' 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은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백묵으로 서툰 솜씨로/쓴다"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저 치떨리는 노여움을 가지고도 차마 소리내어 말도 못하고 나무판자에, 그것도 누가 보면 금새 지워야 하니까 잉크도 아닌 백묵으로, 서툴게 쓰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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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리 2008/06/19 07:34 # 답글

    은유라던가 대입이라던가는 모르시는 건가요?

    단심가는 님이라는 사람이 얼마든지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충성하는 임금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읽는 화자가 그 상황과 감정에 따라서 감정이입이 될 수 있어야 하죠. 저 역시나 타는 목마름으로는 무척 좋아하는 시입니다만....
  • Corund 2008/06/19 08:06 #

    은유라던가 대입이라던가가 반드시 '분명히 제시하는 표현' 보다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저것도 하나의 방법인데 방법을 얼마나 잘 사용했느냐가 문제이지 어느 방법을 사용했고 안했고로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고 봅니다.
  • 로리 2008/06/19 08:08 #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보편성을 기반으로 해야한다라는 것이죠.

    주제의 한계에 갖혀서는 안 되니까요.
  • -_- 2008/06/19 07:39 # 삭제 답글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김지하 시에 대해 자유토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에 대해 나왔던 결론 중 하나가 뽈 엘뤼아르의 시를 표절한 혐의가 매우 짙다는 것이었습니다. 90년대 초반이었는데요, 당시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꽤 공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토론수업의 결론은 '시는 주관적'이라는 쪽에 더 가까운 것이었습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말이지요.

    폴 엘뤼아르(Paul Eluard) - 자유

    내 학생 때 공책 위에
    내 책상이며 나무들 위에
    모래 위에도 눈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읽어본 모든 책장 위에
    공백인 모든 책장 위에
    돌, 피, 종이나 재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숯칠한 조상들 위에
    전사들의 무기들 위에
    왕들의 왕관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밀림에도 사막에도
    새 둥지에도 금송화에도
    내 어린 날의 메아리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밤과 밤의 기적 위에
    날마다의 흰 빵 위에
    약혼의 계절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내 하늘색 누더기 옷들에
    곰팡난 해가 비친 못 위에
    달빛 생생한 호수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들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림자들의 방앗간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새벽이 내뿜는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또 배들 위에
    넋을 잃은 멧부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구름들의 뭉게거품 위에
    소낙비의 땀방울들 위에
    굵은 또 김빠진 빗방울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형상들 위에
    온갖 빛깔의 종들 위에
    물리적인 진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잠 깨어난 오솔길들 위에
    뻗어나가는 길들 위에
    사람 넘쳐나는 광장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켜지는 램프 불 위에
    꺼지는 램프 불 위에
    모여앉은 내 집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거울의 또 내 방의
    둘로 쪼개진 과실 위에
    속 빈 조가바인 내 침대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주접떠나 귀여운 내 개 위에
    그 쫑긋 세운 양쪽 귀 위에
    그 서투른 다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내 문턱의 발판 위에
    정든 가구들 위에
    그 서투른 다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내 문턱의 발판 위에
    정든 가구들 위에
    축복받은 넘실대는 불길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사이 좋은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내미는 손과 손마디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놀란 얼굴들의 유리창 위에
    침묵보다도 훨씬 더
    조심성 있는 입술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은신처들 위에
    허물어진 내 등대들 위에
    내 권태의 벽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욕망도 없는 부재 위에
    벌거숭이인 고독 위에
    죽음의 걸음과 걸음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다시 돌아온 건강 위에
    사라져 간 위험 위에
    회상도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그리고 한 마디 말에 힘입어
    나는 내 삶을 되시작하니
    너를 알기 위해 나는 태어났다
    네 이름 지어 부르기 위해


    자유여.
  • 로리 2008/06/19 07:43 #

    헉 위의 이야기도 나오네요 ^^;;;

    이 것도 고등학교 때... 문학 선생님이 해주던 이야기... 10년 전 생각이 모락모락 납니다. 그 때 표절 이야기도 지나가면서 들었는데.. 저 시로군요.
  • 기불이 2008/06/19 07:44 #

    좋은 이야기이고 좋은 시인데 이런 시도 대상이 너무도 분명하게 제시되어 '시적으로 좋지 않다' 라는 소리를 듣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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