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scent

The Descent (2005) 한국에서는 디센트 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모양이다. 이 영화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만... 이하 스포일러 만땅.

동굴을 택한 것은 영리한 아이디어이다. 별다른 특수효과가 필요하지 않은데도 동굴이라는 배경 자체가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조명이라고는 플래시라이트뿐이라서 관객에게 제한된 정보를 제공하여 관객의 감정을 컨트롤하기에도 편하기 때문이다. 컴컴한 데서 플래시라이트가 휙휙 움직이면 관객은 밝은 부분에 집중하게 되니까 감독은 관객의 시야를 일부 지역에만 집중시키고 뭘 보여줄 건지 자기 맘대로 고를 수 있다. 관객이 심지어 배경조차 전체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같은 세트에서 계속 찍어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저예산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뽑아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

요즘 관객들은 감독 머리꼭대기에 올라앉아서 영화가 시작하면 벌써 최후의 반전이 뭔지 다 예상하고 있다. 사실은 브루스가 귀신이다! 사실은 주인공이 미친넘이다! 사실은 전부 망상이었다! 이런 반전도 처음볼 때나 충격적이지 비슷비슷한 영화를 보다보면 이미 초반부에 깔리는 시시한 복선들로부터 결말을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영화가 영화가 아니라 무슨 퍼즐맞추기 게임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왕왕있다. 그러다보니 감독은 감독대로 관객이 결말을 예측하기 어렵도록 방어하느라 고전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면 이야기가 이상해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옛날에 스크림 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이 영화는 매너리즘에 빠진 공포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작품이었다. 살인마가 나오는 영화라면 지극히 뻔한 패턴이 있다. 공포영화 팬들이라면 줄줄 꿰고 있는 일종의 공식들이 있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순정만화에서 남자주인공의 경우 흑발불패의 법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포영화를 많이 봐서 패턴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앞으로 진행될 내용을 초반부터 미리 넘겨짚고 자기 예상이 맞으면 금새 따분해한다. 이런 공식을 비틀어 저런 건방진 관객들의 기대를 배반함으로써 기존의 공포영화에 식상해하던 팬들의 열광을 이끌어낸 영화가 스크림이다.

이 영화를 만든 제작진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으로, 이 영화에는 초반부터 떡밥을 심심치 않게 던지면서 관객의 예상을 배반함으로써 관객을 즐겁게해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초반부터 사라가 환각을 본다거나 약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거나 동굴에서는 환각을 보는 일이 있고 어쩌구 하는 대사를 쳐서 '음... 주인공이 미친년 으로 나갈 모양이군.' 하고 생각하게 하더니, 동굴이 무너지고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 본격 재난영화로 탈바꿈해서 '오오 그런 잔재주는 안피울 모양이군.' 하고 안심하게 했다가, 난데없이 괴물들이 개떼같이 쏟아져나와 졸지에 피비린내나는 난투극으로 변신해서 당황하게 하는가 하면, 원래 버전에서는 결국 '주인공이 미친년' 으로 끝났다고 한다. 북미버전에서는 마지막에 동굴에서 깨어난다는 씬이 잘려나가고 없다.

그러나 스크림과는 완전히 다르다. 스크림은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고 장르적 습관을 비틀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야기가 중심을 잃고 헤맨다거나 갈팡질팡하지는 않는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The Descent 를 놓고 열린결말이 어쩌구 감독의 암시가 어쩌구 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는 모양인데 내가 볼 적에는 단순히 감독이 무책임한 것 뿐이다. 장면장면은 훌륭한데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야기가 말도 안되는 것이다.

주노는 왜 사라와 친구들을 무책임한 동굴탐사에 초대했나? 사라를 가둬서 죽이려고? 그랬을 거라면 뭐하러 사라를 구하겠다고 그 난리를 뽀개나. 마지막에 사라가 주노에게 복수를 하는 이유는 자기남편과 주노가 모종의 관계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근데 이미 죽은 사람의 외도를 알았다고 해서 주노에게 복수를 해야 하나? 굳이 이야기를 꿰맞춰보자면 초반에 남편이 주노와의 관계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사라가 남편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사고가 나서 남편과 아이가 죽었다 -> 그러니까 사고가 난 건 주노 니년 때문이야. 이렇게 되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고가 난 건 사라 당신이 운전중인 남편에게 말을 걸어서 주의를 분산시켰기 때문이잖아. 결국 사고를 유발해서 남편과 아이를 죽인 것은 당신이야. 넘을 원망할 상황이 아니라니깐. 아참 결국 '주인공이 미친년' 이었지, 그러면 말이 되긴 하네.

동굴속의 괴물들은 눈이 퇴화되어 못본다는 설정인데 청각은 발달했으면서 후각은 맛이 갔나? 땀냄새 살냄새 진동하는 여자들이 바로 옆에 있어도 소리만 안내면 모른단 말이지. 게다가 나중에는 횃불이 옆에 있어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온도도 느끼지 못하는 거야? 햇볕 한줌 안드는 깊은 산속 동굴속은 꽤 추울 것 같은데 털하나 없이 미끈미끈한 놈들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가죽이 꽤 두꺼워서 온도를 못느끼나 보다. 근데 뾰족한 걸로 찌르면 풍선처럼 터져서 피가 쏟아지던데. 아니 여자들이 이야기할 때 입김도 안나오는 걸 보면 그 동굴은 꽤 따뜻했을 지도 모르지. 근데 그 깊은 동굴안이 과연 따뜻할까? (추가: 애팔로치아 동굴의 온도는 보통 섭씨 11도 부근이라고. 그 여자들처럼 가볍게 입고 돌아다니기에는 다소 추운 온도이며 게다가 물에라도 빠지면 정말 후덜덜 떨어야 할 온도.)

눈도 퇴화되어 못보는 넘들이 동굴 바깥에 나가서 동물들을 사냥해와서 먹고산다니 그것도 놀라운 일이다. 두눈 멀쩡한 고양이과 짐승들도 사냥해서 먹고 살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지. 게다가 이 괴물들은 가진 무기라고는 이빨뿐인데 대체 어떻게 사냥을 하는지... 떼거지로 덤벼서? 사냥은 했다고 치고 대체 어떻게 동굴로 다시 돌아오는 걸까. 남아있는 동료들이 소리라도 질러주나. 후각이 발달했다면 냄새로 자취를 찾아 돌아오겠다만 저 넘들은 땀냄새 살냄새 피냄새 풍기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어도 냄새를 못맡는 넘들이다. 아니 참 '주인공이 미친년' 이니 결국 괴물같은 것도 없었던 거겠다. 그러면 말이 된다, 응.

근데 '주인공이 미친년' 이면 사라가 혼자 떨어져있던 동안 중간에 다른 친구들이 괴물에게 쫓기는 이야기들은 전부 사라의 환각이겠다. 이런 편리한 설정을 봤나. 한참 영화를 봤어. 근데 그게 전부 환각이야. 그래서 앞뒤가 안맞아. 아, 그랬구나 하하하...... 이게 말이 되냐고. 괴물이 없었다면 나중에 친구들이 죽어나가는 장면에서 '아, 그래서 그 친구들이 이렇게 반응했구나.' 이런 것을 깨닫고 전율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장화홍련' 을 예로 들어보면 나중에 우리는 "아, 그래서 아버지가 저렇게 반응했던 거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전율하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미친년' 노선으로 나가려면 최소한 이런 장치는 해두는 게 상도의가 아니냐? "유주얼 서스펙트" 를 봐라. 그동안 들은 이야기가 전부 구라였어. 근데 그게 구라여야 할 이유가 있었어. 그걸 깨닫고 뒷골에 전율이 쫙 흐른단 말이야. '그건 전부 구라' 노선으로 가려면 최소한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볼 적에 The Descent 는 제대로 된 영화가 아니라 일종의 캐탈로그 인 것이다. 감독이 "나는 이런 장면도 찍을 줄 알고요 이런 것도 찍을 줄 알고요...." 하고 자랑하는 그런 것. 장면장면들은 끊임없이 다른 영화들을 연상시키지만 대체 그 장면장면들을 오마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거야.

물론 이 영화가 그렇다고 해서 졸작이다! 이런 이야기는 아니죠. 그만하면 잘만든 영화고 여기저기 감독의 재치가 빛나는데 그렇다고해서 공포영화의 새희망이라는 둥 걸작이라는 둥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다, 이런 이야깁니다. 마지막에 사라가 동굴을 빠져나오는 장면에서 동굴입구를 덮은 나뭇가지틈에서 나오는 장면을 봐라. 그 장면을 보면서 이 감독, 정말 머리가 좋구만! 하고 감탄했습니다. 저거 당연히 단순히 나뭇가지를 배우가 뚫고 나오는 것을 찍은 것이죠. 그런데 나뭇가지틈이 아니라 정말 땅속에서 나오는 장면을 찍으려면 결국 땅을 파든가 아니면 땅에 구멍이 있는 장소를 찾든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다 돈이 드는 일인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냥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잘 찍으면" 나뭇가지에 덮여서 보이지 않는 입구로 나오는 장면이 되는데. 게다가 이 쪽이 더 그림이 멋진 것이다. "동굴을 빠져나오는 장면" 이라고 해서 꼭 땅속에서 손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선입견인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저 감독이 재능이 번쩍이는 사람인 것은 틀림없어요. 게다가 저게 무대가 미국 애팔로치아 산맥인데 미국에서 찍었을 리가 없죠.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래도 미국이라는 암시를 주려고 자동차도 운전석이 왼쪽에 있는 차를 섭외하고 마지막에 도로를 달릴 때 우측통행을 하는 거 봐라. DVD 를 몇번 돌려서 확인해봤지만 자동차 번호판이 보이지 않도록 교묘하게 찍고 편집을 해서 번호판으로 영국인지 미국인지 알 수 없도록 했더라구요. 이런 것을 봐도 저 감독이 장면장면은 얼마나 꼼꼼하게 찍었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것저것 다 보여주려다가 영화의 통일성이 붕괴한 것 뿐이다.

저예산의 압박속에 자기가 얼마나 재능넘치는 사람인지 한번에 다 보여주려고 욕심을 많이 부린 것 같은데 재능있는 건 이제 알았으니 예산도 좀 여유가 생기고 하면 모쪼록 하나에 집중해서 완성도 높은 영화를 찍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영화를 놓고 퍼즐조각맞추기에 열심인 사람들도 많은 것 같던데 이런 사람들이 더 문제다. 퍼즐맞추기를 해야 하는 영화도 있지만 영화감상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감독의 숨겨진 의도맞추기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저런 관객들이 어거지로 영화내용을 끼워맞춰 주기 때문에 감독들이 점점 게을러져서 별 계획없이 되는대로 떡밥을 던져놓고서 "열린결말"이네 어쩌네 하고 허세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by 기불이 | 2008/04/09 03:39 | 모기불 문화통신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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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Cranberry at 2008/04/09 10:03
가끔은 말이죠... 기불님과 제 감상 패턴이 너무 비슷해서 '이건 설마 공돌이적 사고의 공통적인 패턴인 건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정말 그런 걸까요? -_- 그 극찬을 받은 '디센트'를 두근두근 기대하면서 보고 나서 (역시 공돌이인) 신랑과 함께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대충 볼만하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극찬을 받을 정도는 아닌데?"라며 떫떠름한 입맛을 삼킨 기억이 있거든요...

우리 두 사람이 최고로 꼽는 공포영화는 뭐니뭐니해도 "이벤트 호라이즌" -_-)b
심심하면 "DO YOU SEE?!?!!!!!!" 하면서 놀 정도로;;;
(물론 공포영화적 취향보다는 B급 SF적 취향에 좀 더 가까운 저희 부부의 개인적인 입맛 탓이겠지만요... 취향이라능 ... 존중해 주시라능...)
Commented by joyce at 2008/04/09 12:59
도대체 열린 결말이라고 하는 것 치고 제대로 된 영화 못 본 것 같아요.
Commented by 지나가는이 at 2008/04/09 18:22
미국말고 다른나라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면 점수를 더 주는 이상한 풍토가 있죠. 참고로 이 감독은 영국감독. 저도 별로 재미없게 봤음. 네이버 가보니까 모든게 환상이라고 아예 규정을 지어놓은 리뷰어가 있더군요. 가끔 반전이 있는 영화를 보면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인간들이 꼭 있더군요. 제멋대로 내용을 바꿔버리는데 환각제로 맞았는지 물어보고 싶더군요.
Commented by 기불이 at 2008/04/09 22:20
Cranberry// 우리가 상식인이라서 그런 겁니다.

joyce// 뭐든지 시작하면 결말을 제대로 짓는 습관을 초딩때부터 확실히 들여놓아야 합니다.

지나가는이// 그래도 저예산영화라는 것을 감안하면 잘 만든 작품이긴 합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Commented by capcold at 2008/04/10 04:45
!@#... 앗, 제목에 오타가...:-)
Commented by 기불이 at 2008/04/10 05:51
앗, 우째 이런 일이.... :-(
Commented by 대밋 at 2008/04/10 08:23
위도에 따라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우리나라의 석회동굴들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섭씨 15도 정도를 유지하는 법이죠.
Commented by 기불이 at 2008/04/10 08:51
애팔로치아 산맥의 동굴들 경우는 연중 화씨 52도 부근이라고 합니다 (섭씨 11도쯤). 섭씨 11 도라면 꽤 쌀쌀한 온도죠.

사람 입김의 온도는 대략 섭씨 30도선이고 온도차이가 20도가 나면 입김이 보이기 시작한다니까 애팔로치아 동굴안에서 입김이 보일 수도 있겠고 안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보통 동굴은 대단히 습도가 높죠. 습도가 높은 곳에서는 입김이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에서 보이게 되므로 애팔로치아 동굴안에서는 입김이 보일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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