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돌이는 대단해! 지워지는 볼펜. by 기불이

지울 수 있는 볼펜, FRIXION 을 읽었다. 정말 공돌이는 대단하지 말입니다.

지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연필로 쓴 글씨는 지우개로 지워지죠. 이건 물리적으로 색을 제거하는 겁니다. 연필심은 탄소인 흑연인데 종이표면에만 묻어있으니까 지우개는 자기가 닳으면서 흑연과 종이를 긁어내고 그래서 글씨가 지워집니다. 볼펜으로 쓰면 잉크가 종이섬유에 깊게 고착되고 그러니까 안지워지죠. 지우개로 박박 문지르면 종이를 긁어내면서 약간 지워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안지워집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특수지우개로 지워지는 볼펜이 나왔다는군요.

자세한 원리는 모르겠는데 특수지우개가 만드는 열에 의해 지운다고 합니다. 60 도 이상이 되는 곳에서는 잉크가 투명해진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열에 의해 구조가 변형되는 물질을 채용한 모양. 그러니까 이건 화학적으로 색을 제거하는 겁니다. 색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가시광선을 흡수하는 물질이 색을 냅니다. 하얀색 물질은 가시광선을 모두 반사하는 것이고 까만색 물질은 가시광선을 모두 흡수하는 것입니다. 빨간색과 파란색을 흡수하면 (빨주노초파남보 에서 빨강과 파랑계열을 제외하면 노랑과 초록만 남음) 녹색으로 보이고 그래서 나뭇잎은 녹색입니다.

빛을 흡수해서 색을 내는 물질은 대개 이중결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중결합은 시스-트랜스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물질은 자외선에 의해서 시스-트랜스 구조를 왔다갔다 하기도 합니다. 이런 물질이 자외선을 만나서 구조가 바뀌면 색을 가지지만 자외선이 줄어들고 에너지를 잃으면 다시 구조가 바뀌면서 색을 잃게 되는 (가시광선을 흡광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시스-트랜스는 흡광하는 파장이 다름), 햇볕이 강한 곳에 가면 저절로 색이 바뀌는 안경렌즈에는 이런 물질이 코팅되어 있죠. 저 볼펜에 사용된 색소는 아마도 열에 의해서 구조가 변형되어 색을 잃는데 비가역적으로 잃는 물질인가 봅니다. 혹시 60 도 정도에서 중합해서 고분자가 되어버리는 것일 지도 모르고. 고분자가 되면 이중결합이 없어지니까. 근데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영하 10도쯤에서 글씨가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니까 중합은 아닌 것 같고 아마 시스-트랜스 변형일 것 같습니다.

이것과 반대로, 색이 없다가 나중에 색이 나오게 되는 소위 비밀글씨를 쓰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가령 레몬즙이나 식초로 글씨를 쓴 다음에 열을 가하면 유기물질들이 산화되어 (쉽게 말해서 타서) 까맣게 되기 때문에 글씨가 나오죠. 한때 유행했던 것으로는 자외선을 흡광하는 물질로 만든 잉크로 글씨를 쓰면 자외선을 비출 때만 글씨가 보이게 되고.

이 모든 것은 색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면 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색이 뭔지 아는 사람은 세상에 십억 이상이 있지만 이런 지식을 이용해서 저런 대단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죠. 정말 대단한 공돌이들이 아닙니까? 공돌이는 대단해!!

여담입니다만, 칙칙칙 뿌리기만 하면 옷에 묻은 얼룩이 스르륵 사라지는 세제같은 것이 있죠. 무슨 마술같지만 이건 보통 산화제로 색을 내는 물질을 산화시키는 겁니다. 이중결합을 없애버리면 -> 가시광선을 흡광못하고 -> 색이 없어지니까 얼룩도 사라지는 것이죠. 비슷한 이야기로 세탁기 세제에도 산화제가 들어있어서 세제로 제거되지 않는 얼룩따위를 산화시켜 버리죠. 다시 말해 얼룩은 제거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고 해도 가시광선을 흡수하지 못하게 되어 안보이게 됩니다. 물론 계면활성제나 효소가 최선을 다해서 이물질을 제거합니다만 그래도 제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없앨 수 없으면 안보이게 하면 되잖아~ 이런 지극히 공돌이스런 발상. 역시 공돌이는 대단해!!!

혹시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얼룩이 산화가 되면 물에 더 잘 씻겨나가게 되기 때문에 세척에도 도움을 줍니다. 그러니까 얼룩이 전부 산화되어 안보이게 될 뿐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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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외선을 볼 수 있다면. 2007/03/12 08:28 #

    공돌이는 대단해! 지워지는 볼펜. 을 쓰고나서 생각났는데, 자외선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요. 가시광선을 흡광하지 못해서 하얗게 보이지만 자외선은 흡광하는 물질이 많죠. 자외선을 볼 수 있다면 이런 물질들의 아름다운 색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곤충들은 자외선을 볼 수 있는데 그래서 곤충이 보는 꽃은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르다고 하더군요. 우중충한 색의 꽃도 자외선으로 보면 화려한 색을 자랑하기도 한다고 언젠가 본...... more

  • 멋진 이세계 2007/03/13 17:38 #

    공돌이는 대단해! 지워지는 볼펜.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에는 언제나 압도된다. 앞뒤가 맞고 논리와 이유가 있는 정교하고 섬세하고도 확실한 세계. 가능하다면 좀더 적극적으로 이런걸 공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야 싶지만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도 막막하고;; 이제와서 공부한다고 과연 얼마만큼 되겠냐하는 능력문제도 있고;; 그래서...실제적으로 이런걸 스스로 파악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 하는건 무...... more

덧글

  • 플라피나 2007/03/11 11:37 # 답글

    허억 얼룩이 그대로 나는다는 건 몰랐는걸요.
    안 보이게 하면 되는군요!
  • 이등 2007/03/11 12:34 # 답글

    그럼 얼룩 제거된 옷도 자~~알 맡아보면 냄새는 나려나요..?
    화학구조가 바뀌어버렸으니 냄새도 없어지려나...
  • 愚公 2007/03/11 13:01 # 답글

    설명을 들으니... 저는 색을 모르는 군요... OTL...
  • 낭만여객 2007/03/11 13:38 # 답글

    그 안보이는 물질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 두꺼워지지 않을 까요 ㄷㄷㄷ 헛된 망상이군요 ㅠㅠ
  • 곰부릭 2007/03/11 14:22 # 답글

    신기한 지워지는 펜에다가 얼룩제거의 방법까지...
    공돌이는 정말 대단하시지 말입니다!!!

    그나저나 저 펜은 꼭 사고 싶어요!!!!!!
  • 쫑아 2007/03/11 16:38 # 답글

    사막에서는 소용이 없는건가요;
  • 2007/03/12 00:13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기불이 2007/03/12 00:43 # 답글

    비공개// "A 를 흡수해서 B 로 보인다" 와 "B만 반사한다" 는 비슷한 이야기입니다만 이 경우는 제가 흡수하는 파장을 잘못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블루 2007/03/12 07:00 # 삭제 답글

    기존에 나와있던 지우개로 지워지는 볼펜과는 다른원리군요
  • 쿨짹 2007/03/13 00:09 # 답글

    역시 공돌이들은 대단합니다. ㅡㅡ 공순이들도.... 맞죠?
  • 기불이 2007/03/13 00:17 # 답글

    그렇습니다. Man 하면 남자지만, 여자들도 포함해서 사람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처럼 공돌이 하면 남자로 보이지만 사실은 남녀 다 포함하는 그런 개념인 것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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