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물질의 문제: 개론 by 기불이

비타민의 과학 5: 이물질의 문제. 에서 살펴보았듯이, 대표적인 합성 비타민인 비타민 C 의 생산공정에는 별로 신경쓰일만한 이물질이 발생하지 않는다. 현대 제약공업 및 화학공업의 수준은 그렇게 우습게 볼 만한 것이 아니다. 비타민은 그렇다고 하고, "화학에 대해 교양 수준의 상식이 있다면 누구나 알겠지만, 모든 합성물질은 이물질을 포함한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간여행을 자유롭게 하는 외계인이 있다고 해도, 이들도 이물질 분자 하나하나를 핀셋으로 골라서 제거하지 않는 한 100% 순수한 화합물은 만들 수가 없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게 영원하다는 보장은 없다. 왜냐면 안정성이나 오염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화합물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특정조건에서 (가령 온도에 의해, 자외선에 의해, 물에 의해) 분해되거나 변형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반응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100% 순수한 화합물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은 불가능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과학이 택한 길은 이물질의 최소화와 관리.

"화학에 대해 교양 수준의 상식이 있다면 누구나 알겠지만, 모든 합성물질은 이물질을 포함한다. (중략) 비타민의 섭취는 어떤 이물질이 섞여있을 지 모를 '합성 비타민'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식생활 개선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라고 말할 때는 이물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심어주려는 악의에 찬 의도가 느껴진다. 천연물의 추출물이란 것은 이것저것 종류도 다 셀 수 없는 화합물의 혼합물이어서, 어느 것이 주 유효성분이고 어느 것이 이물질인지 사실 나누기도 난망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데 이런 것을 벌컥벌컥 먹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 지독할 정도로 관리되는 합성물질의 이물질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쏘아죽이고 시체는 가볍게 잘라서 처리하면서 거미를 보고 징그럽다며 비명지르는 킬러에 비유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이물질이 관리되는지 우선 간단하게 훑어보도록 하자.

최초의 디자인에서부터 세포수준의 효능시험, 독성시험 등등을 거쳐 생쥐 (mouse), 쥐 (rat), 토끼, 개, 원숭이 등 동물시험을 지나 사람에게서 기초적인 약동력학 결과를 얻는 전(前)임상까지만 와도 대단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를 지나면 임상 1상, 2상, 3상이 있고, 여기에 이르기까지 보통 7년-10년의 세월동안 살아남은 화합물 (수만개 후보화합물중의 하나) 은 비로소 자료를 모두 모아 FDA 에 제출하고 승인을 기다리게 된다. 이때 제출하는 자료중에 이물질에 관한 자료들이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대량생산을 담당하는 process chemist 들은 대단히 유능해서 대단히 높은 수율로 대단히 높은 순도의 후보물질들을 임상시험을 위해 대량으로 합성해내는데, 이때 당연하게도 극소량 잔류하는 이물질 중에서, 0.1% 가 넘는 것들은 모두 따로 분리해서 구조를 규명하고, 거의 신약 후보물질 수준의 시험을 해서 자료를 첨부해야 한다. 0.1% 라고 하니까 와닿지를 않는데, 예를 들자면, 설탕 한 푸대 (20kg) 에 라면스프 2 개 (22g) 이상 섞여있는 이물질은 모두 따로 관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정이라는 것은, 화학물질이 일정한 배열로 쌓인 것을 말한다. 결정이 아닌 고체를 무정형 (無定形) 이라고 한다. 결정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 (쌓이는 방법이 달라지면) 다양한 결정형을 얻을 수도 있는데 이것을 다정형 (多定形, polymorph) 라고 한다. 다정형중에서도 다른 다정형들이 싫어하고 괴롭히는 것을 따정형이라고 한다 (거짓말입니다). 같은 화합물이라도, 무정형이나 다양한 결정형은 모두 다른 화합물로 간주되어 다 따로 시험을 한다. 때로는 보관중에, 특정조건에서 결정형이 바뀌기도 하는데, 비록 화학적으로는 같은 물질이지만 결정형이 달라지면 물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물질로 간주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도 이물질에 포함된다.

일단 후보물질이 결정되면, 캡슐이나 알약을 만들어서 단기 가혹시험 (고온 고습도) 이나 장기시험을 통해 안정성을 시험하게 된다. 일단 약이 출시되면 다양한 기후조건에서 팔리게 되고, 다양한 조건에서 보관하게 되므로, 미리 일단 시뮬레이션을 통해 과연 다양한 조건에서 변형되지 않고 보관가능한가를 시험해야 하는 것이다. 미리 결정된 타임테이블에 따라 (1개월, 2개월, 4개월, 6개월 등) 시료를 꺼내어 성분을 조사하는데 간혹 초기에는 없던 것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들도 분리하여 구조를 규명하고 어째서 생겼나 그리고 위험하지는 않나 하는 것을 다 규명해야 한다. 이 안정성 데이터를 기반으로 약의 보관조건 및 유효기간이 결정되고 명시된다. 그러니까 제발 좀 써있는대로 보관하고 (냉장보관, 직사광선을 피할 것 등등) 유효기간이 지나면 버리세요 (약의 폐기에 관련한 이슈에 대해서는 약에 의한 환경오염 총정리편 참조).

이런 모든 데이터를 모아서 FDA 에 제출하고, 모든 것이 분명하다면 허가가 나와서 비로소 시판할 수 있게 된다. FDA 가 판단하기에 데이터가 미흡하다거나 저런 이물질에 대해 제대로 시험을 하지 않았다면, 허가는 보류되거나 아예 거절되기도 한다. 우리가 약국에서 구할 수 있는 약은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쳐서 허가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저 약들을 먹는 것이다.

위험요소가 관리되고 있는 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집집마다 몇개씩 있는 식칼은 날카로와서 사람을 충분히 죽일만 하지만, 부엌의 정해진 장소에 보관되고, 적절히 사용되는 한 아무도 불안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드물게 자기 집의 식칼때문에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아주 드물게 강도가 그 집 식칼을 쓰기도 하고),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것을 우려해서 식칼을 집에서 다 치우지는 않는다. "화학에 대해 교양 수준의 상식이 있다면 누구나 알겠지만, 모든 합성물질은 이물질을 포함한다. (중략) 비타민의 섭취는 어떤 이물질이 섞여있을 지 모를 '합성 비타민'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식생활 개선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라는 말은, 상식이 있다면 누구나 알겠지만, 모든 식칼은 소유주에게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음식을 자를 때 언제 다칠지도 모르는 식칼을 쓰지말고 손톱이나 이로 찢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식칼은 위험하지만 잘 사용하면 별다른 문제가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합성물질은 소량의 이물질을 포함하게 되지만, 이물질이 규명되고 관리되는 한 큰 문제는 없다는 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글을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지난 글에서 예고한 사례는 다음글에서 다루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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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물질의 문제: 감기약의 사례 2005/04/18 15:47 #

    이물질의 문제: 개론 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약품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물질은 엄격한 기준하에 관리되고 있다. 그리고 그 글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것과 같이, 보관중에 새로운 이물질이 생겨나는 경우도 있다. 이 포스팅은 최근 보고된 감기약의 사례를 통해, 이런 경우 제약산업은 어떤 조치를 취하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본격적으로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몇가지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신약의 후보물질은 종종 산(酸) 이나 염기와 반응시킨 염(鹽) 의 형태로 개발된다. 용해도를 개선하기 위해서 혹은 고체로 만들기 위해서,...... more

덧글

  • prozac 2005/04/18 01:09 # 삭제 답글

    트랙백을 해주시면 제가 오히려 영광이지요. 그참에 저도 관련글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될테니까요.
    약의 이물질의 문제에 관해 사람들은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기 쉬울거라고 생각됩니다. 저도 제약공장들 견학하고, 공정개발하는 사람들의 강의를 듣기전까지는 몰랐던 사실들이 많으니까요. 그런점에서 기불이님 글은 대단히 중요한글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기불이 2005/04/21 00:35 # 답글

    쓰다보니 어거 언제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이모저모 뜯어봐도 저렇게 황당한 글은 보기 드물죠. 씹어도 씹어도 또 진국이 우러나는 대단한 글입니다. 앞으로도 몇 개 더 나올 것 같은데 다 트랙백을 보내놓겠습니다. 저도 나중에 관련글을 찾기가 쉬울 것 같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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